[Update] 3. 중세사회의 교육 1 | 중세 계급 – Pickpe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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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http://march.kwedu.net/mm/mm03.html

제 3 강의

중세사회의 교육 1

            – 서양 중세

오늘이 벌써 세 번째 주제군요. 수업에 참여하기 전에 꼭 강의록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하면서, 오늘은 ‘서양 중세사회의 교육’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서양 중세의 성립 배경과 사회경제적 및 사상적 특징

첫째로, “서양 중세사회가 어떠한 배경에서 성립되었으며, 그 사회경제적ㆍ사상적 특징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검토해 봅시다. 중세시대란 일반적으로 신 중심, 내세 중심의 기독교적 가치가 절대적으로 지배했던 시기로서,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5세기 중엽부터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15세기 중엽까지 약 천년간의 시대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경제사관을 취하는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봉건사회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이는 소수의 영주와 다수의 농노가 토지를 매개로 맺은 생산관계를 중시하여 사용하는 개념입니다.

중세 봉건사회가 성립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시간에 간단히 언급한 바 있는 로마 후기의 사회상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제국을 건설하기까지 로마인들은 실제적이고 실용적이었으며, 강한 도덕심과 준법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제국을 건설하고 난 이후에 수많은 노예들의 노동력을 통해 얻은 부로 인해 사치와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회적 기강이 해이해졌음은 물론 폭압적인 무력통치와 수탈에 대한 피정복민(노예)들의 다양한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피정복민이나 노예들의 저항은 크게 정치ㆍ경제적인 성격과 종교적인 성격으로 구분하여 분석할 수 있는데, 전자는 봉건제라는 경제적 생산관계의 형성에, 그리고 후자는 기독교라는 사상적ㆍ문화적 가치체계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노예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다양한 형태의 저항에 부딪히게 되자 지배계급은 지속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노예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농노라는 신분인데, 농노들은 과거 노예와 달리 영주(주인)의 직영 농지에서 온종일 강제적으로 일하는 대신 위탁농지에서 주체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일하고, 그 소출의 일부를 영주에게 현물(세금)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화폐 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현물 대신 화폐로 납세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영주와 농노의 관계가 바로 정치ㆍ경제적인 면에서 중세사회를 특징 짓는 봉건적 장원제 또는 농노제입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관계가 형성된 근본 원인을 생산력의 발전에서 찾고 있다. 그에 따르면 고대시대의 주요 생산관계였던 노예제를 통하여 생산력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게 되자 이러한 생산력을 지속적으로 담보해 줄 새로운 생산관계가 요구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농노제 또는 봉건제이다.)

물론 봉건제의 성립과 발달에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도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황제나 영주들은 게르만족의 침입을 저지하고 느슨해진 사회질서를 틈탄 노예들의 지속적인 이탈을 막기 위해서 군사력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러한 필요에 의해서 군사력을 지닌 사람들에게 방위와 노예관리를 맡기면서 일정한 보수(토지)와 작위를 지급하였습니다. 바로 이들이 영주와 농노들 사이의 중간계층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토지를 매개로 한 주군-신하(중간관리자)-농노의 관계가 형성되었고, 이러한 관계는 봉건제라는 중세적 생산관계의 골간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다른 한편 종교적인 측면에서 노예들 또는 피지배자들은 그들을 지배계급의 억압과 수탈로부터 구원시켜 줄 구세주(메시아)를 갈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이미 오래 전부터 조르아스터교라는 원시종교가 존재했었는데, 이 종교에 메시아의 출현과 박해, 사망, 그리고 부활 등이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원래 당시 민중들이 갈구한 메시아는 로마 지배계급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되찾아 줄 강력한 정치적 지도자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세보다는 내세에서의 구원을 강조하는 예수(Jesus)의 가르침은 정치적 의미의 해방을 갈구하던 민중들의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억압하고 지배하는 자들보다는 억압받고 지배받는 자들이, 부자들보다는 가난한 자들이 그리고 강한 자들보다는 약한 자들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으며, 모든 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예수의 외침은 민중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마태복음, 19장 24절)는 예수의 웅변이 당시의 민중 또는 서민들에게 얼마나 통쾌했겠습니까? 예수의 이러한 설득력에 12사도를 비롯한 추종자들의 희생적인 선교활동, 그리고 사치 향락과 부정부패를 일삼는 지배계급의 행태에 비판적인 입장에 있던 일부 지식인과 상류층의 우호적인 태도가 곁들여져 로마 지배계급의 혹독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짧은 시간에 전 유럽사회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로마제국의 공인된 종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고, 결국 중세 1,000년 간 교육을 포함한 모든 생활양식을 지배하는 강력한 종교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황제와 영주들을 중심으로 하는 세속적인 지배세력과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세력 간에 많은 갈등과 대립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피지배계급에게 더 유리하고 매력적이던 기독교를 지배계급이 결국 수용하고 국교로 인정하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순수한 기독교 신앙에 근거하면 그 근본적인 원인은 넓은 의미로 ‘야훼(여호아)의 섭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문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기독교가 표방하는 이념이 현실 사회에 존재하는 세속적인 지배세력의 이해관계와 어느 정도 부합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있다면 이러한 주장에 대해 수긍하지 않음은 물론 기독교 신앙을 모독하는 말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부언하자면, 어떤 종교나 사상이나 철학 등이 사회 현실과는 무관한 형이상학적 본질의 세계나 관념의 세계만을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활동인 이상 발을 딛고 살아가는 실제적인 현실 세계와 어떠한 방식으로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난 기독교 이념 자체의 성격도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관심을 갖고자 하는 문제는 기독교 이념이 현실 사회와 어떻게 그리고 어떠한 영향을 주고받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보면, 고대의 노예제 사회가 쇠퇴하고 중세 봉건제 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기독교와 지배계급이 일정 기간의 대립ㆍ갈등을 거쳐 결국 화해를 했던 이유는, 그러한 화해가 양자 모두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몇 가지 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당시의 기독교는 직접적인 현실 사회에서가 아닌 내세에서의 해방과 구원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한시적인 현실 사회에서는 비록 억압받고 고통을 겪으며 굶주리더라도 영원한 천국에서 평등과 자유와 해방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이 믿음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피지배계급에게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고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는 너무도 소중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내세에서의 구원에 대한 이러한 희망은 억압과 수탈을 일삼던 지배계급에게도 ‘현실적인 면’에서 매우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불만을 해소해 줄 적절한 도구가 필요했는데, 정치ㆍ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과거의 노예보다 비교적 자유로운 농노라는 신분제도가, 그리고 사상적 또는 이념적인 면에서는 내세의 구원이라는 논리가 그러한 역할을 훌륭히 감당해 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는 마태복음(22:15-21)의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헌금(십일조)의 의무가 영주들에 대한 납세의무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교회의 위계구조 또는 신과 인간의 주종관계, 그리고 노예제도에 대한 구약성서의 인정 등이 지배와 피지배라는 사회적 계급구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었으리라는 사실은 당시의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세사회의 성립기에 기독교가 지배계급에 의해 공인될 수 있었던 이유를 한 가지만 더 지적하면, 지배계급은 자신의 영토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계속 남하해 오는 야만적 게르만족을 적절히 교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초기에는 군사력을 이용하여 게르만족의 침입을 어느 정도 저지할 수 있었으나 나중에는 그 규모가 단순한 물리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되자, 지배계급은 보다 전향적인 태도로 그들을 교화하여 자국민으로 흡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이러한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훌륭한 이념적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은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이미 배우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당시의 세속적인 지배세력이 새로이 변화된 사회 상황에서 기독교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고자 했다면, 역으로 교회는 지배계급의 공인과 후원을 통해 신앙의 제일 사명인 선교 사업을 가장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초기의 기독교가 지녔던 순수성이 상당히 변질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질은 나중에 새로운 종교개혁을 불러일으키는 기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요컨대 이 양자가 적절히 결합되어 공동의 이익을 꾀함으로써 기독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중세 봉건제 사회가 성립, 발전되었던 것입니다.

2. 서양 중세의 대표적 기독교 교육기관과 그 특징

두 번째로 “서양 중세사회의 기독교 교육기관은 어떠한 것들이 있으며, 각 기 관이 견지한 주요 교육목적과 내용, 그리고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살펴봅시다. 앞에서 우리는 중세사회가 성립된 배경을 정치ㆍ경제적인 측면과 종교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중세사회의 정치ㆍ경제적인 특징으로 봉건제를, 사상ㆍ문화적인 특징으로 기독교 이념을 들었습니다. 중세사회의 교육 또한 정치ㆍ경제적인 측면과 종교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전자의 틀에 의해 세속교육을 그리고 후자의 틀에 의해 종교교육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세속교육은 다음 차례로 미루고, 여기에서는 종교교육기관을 먼저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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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입장에서 중세를 한 마디로 요약하여 말하면 ‘선교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선교의 주요 대상은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기층 민중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정치ㆍ경제ㆍ문화ㆍ교육 등 제반 영역에서 매우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해방과 평등과 박애라는 기독교 이념을 쉽고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비기독교도들을 기독교도로 개종시키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학습과 세례라는 의식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의식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들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도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준거가 바로 그 사람이 학습과 세례를 받았는가의 여부에 있을 정도입니다. 이는 마치 대부분의 원시부족에서 한 사회집단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반드시 성년식이라는 의식을 거쳐야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학습과 세례라는 종교의식을 거론하는 이유는 그것이 중세 최초의 기독교적 서민교육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위해서는 학습과 세례라는 의식을 반드시 거쳐야 하고, 학습과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보다 효율적인 선교사업을 위해 이교도들에게 기독교 교리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전수해 주는 활동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을 것입니다.

중세 초기(더 정확하게 말하여 로마 제정시대 말기, 약 2세기경)에 이러한 필요에 의해 생긴 것이 바로 ‘문답학교’인데, 기독교가 짧은 시기에 널리 확산된 배경에는 이 문답학교의 역할이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학교의 목적이 이교도의 세례에 필요한 기초 교육에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성인들을 주요 대상으로 하다가 나중에는 어린이들도 입학시킴으로써 일종의 초등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전성기의 수학 연한은 약 3-4년 정도이고 대개 예과생-본과생-선발생 등의 3단계의 교육과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모두 이수하면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교회의 성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문답학교가 활성화되면서 이 학교에서 가르칠 교사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동시에 2세기가 되도록 기대했던 예수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자 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교회의 이론적 기초를 보다 굳게 다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당시에 이론적으로 가장 위협적이던 그리이스 철학에 대항하여 기독교의 교리와 정신을 옹호할 강력한 이론적 기반을 구축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생긴 것이 바로 ‘문답교사학교'(고급문답학교)입니다. 따라서 이 학교의 목적은 한편에서 문답학교의 교사를 양성함과 아울러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의 지도자 또는 이론적 호교가(護敎家)를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학교의 교장들을 일컬어 교부라 하였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세 초기의 교부철학이란 바로 이들이 호교를 목적으로 전개한 철학을 이르는 말입니다. 따라서 교부철학에서는 이성보다 신앙을 우선적인 것으로 인식하였으며, 그 결과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은 신학의 시녀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이 학교의 목적이 그리이스의 철학에 대항하여 교회의 이론적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이스 철학의 단점을 밝히기 위하여 당연히 철학, 수사학, 물리학, 천문학, 문학, 역사, 과학 등 그리이스 철학과 사상을 중요한 교육내용으로 다루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기독교와 그리이스 철학의 교류 또는 교섭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섭은 오랜 세월 후에 스콜라철학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문답학교와 문답교사학교와 더불어 중세를 대표하는 중요한 학교가 있었는데 바로 ‘수도원학교’가 그것입니다. 수도원은 원래 승려들의 수양소인데 문화적 암흑기였던 중세에 거의 유일한 문화보호기관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기관입니다. 수도원의 성립 배경을 먼저 살펴보면, 로마 말기의 사회적 타락과 향락주의 그리고 지배계급과 결탁한 교회의 세속화와 부정부패에 혐오감을 느낀 사람들이 3-4세기경부터 세간을 떠나 산중에서 조용히 수도생활을 하면서 시작된 것으로서, 6세기경에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수도원은 정결, 청빈, 순종을 이상적인 덕목으로 삼아 73개조의 계율을 정하여 엄격한 노동과 기도 생활을 유지하였으나, 중세 말기에 이르러서는 타락과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보카치오는「데카메론」에서 수도원의 타락상을 사실적으로 잘 그려주고 있는데, 당시 수도원이 얼마나 타락했는지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한번쯤 읽어봄직한 책입니다).

수도원은 초기에는 성직자가 될 사람들에게만 개방하였으나 9세기경부터는 일반인에게도 입학을 허용했습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수도원학교는 성직자를 지망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내교와 일반적인 교양을 수학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외교로 구분되어 운영되었습니다. 수도원학교의 단계는 초등과와 고등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초등과에서는 읽기ㆍ쓰기ㆍ셈하기, 음악, 라틴어, 문법 등을 가르쳤고, 고등과에서는 7자유과(seven liberal arts, 7교양과)를 가르쳤습니다. 지난 시간에 설명했듯이 7자유과는 3학(문법ㆍ수사ㆍ변증법)과 4과(산술ㆍ기하ㆍ음악ㆍ천문학)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규모가 작은 학교에서는 3학만을, 큰 학교에선 3학과 4과를 모두 가르쳤고, 가장 완전한 수도원에서는 7자유과 외에도 신학까지 가르쳤다고 합니다. 교육방법은 단식과 체벌 등과 같이 매우 엄격하였으며, 대부분의 생활이 철저한 규율과 고행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수도원학교가 미친 영향은 매우 중요한 교육사적 의의가 있습니다. 두 가지만 지적하면, 첫째로 고대 그리이스의 문헌 등을 필사(筆寫, 원전을 그대로 베끼는 일)하여 후세에 전달해 줌으로써 나중에 문예부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점입니다. 둘째로는 우수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함으로써 조금 후에 설명하게 될 본산학교와 함께 중세 대학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외에도 중세의 기독교 교육기관으로 본산(本山)학교(사원학교, 감독학교)가 있었는데, 이는 교회의 각 교구의 본산 소재지에 설립되어 있었습니다. 본산학교는 4-5세기경에 발생하기 시작하여 8세기에 카알 대제의 장려로 크게 발전하였으며, 11-12세기경에 전성을 이루었습니다. 이 학교는 중세 기독교 교육기관 중에서 가장 수준이 높은 고등교육기관이었으며, 성직자의 양성과 일반 귀족 자제의 교양교육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교육내용으로는 읽기, 쓰기, 찬송가 등과 같은 기초과목과 성경, 신학, 문법, 철학, 과학, 그리이스 문예 등과 같은 고등과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부철학의 발전이 문답교사학교의 교장, 즉 교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스콜라철학은 이 본산학교의 교사들에 의해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본산학교 교사들이 기독교 교리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성경과 그리이스 철학 등을 심도 있게 연구한 결과가 스콜라철학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따로 설명할만한 지면이 없을 것 같아 여기에서 중세 후반의 스콜라철학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중세 후반의 유럽 사회는 오랜 십자군전쟁과 페스트로 인해 철저하게 황폐화되어 결과적으로 신앙과 교회의 권위가 약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시에 십자군원정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다양한 문화에 접하도록 함으로써 신학의 편협성을 인식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중세 전반처럼 신의 존재와 교회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도록 요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는 합리적인 이성과 철학을 통해 신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증명해야 할 필요에 봉착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필요에 따라 나타난 것이 바로 스콜라철학입니다. 따라서 스콜라철학이 주로 수행했던 과업은 이성을 통해 신앙을 지지하고, 철학을 통해 교회를 옹호하며 논쟁을 통해 이단을 공격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대 시대에는 최고의 위치를 점했던 철학과 이성이 이제 신학과 신앙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적 도구로 전락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콜라 철학이 교육에 미친 영향을 적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중세대학에서 신학이 주요 교과로서 지위를 확보한 것도 바로 스콜라철학의 학문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그리이스의 문화와 철학이 근대에 전달될 수 있었던 것도 스콜라철학자들이 종교적인 필요에 의해 깊이 연구한 학문적 성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중세 기독교의 교육기관과 그 특징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중세 기독교 교육은 기독교의 절대적인 지배하에 발생하고 발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중세의 기독교 교육은 그리이스와 로마의 교육과 사뭇 다른 특징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체적ㆍ수사적 훈련이나 자연적 심성이나 인간적 흥미, 개성의 발전이나 미적ㆍ지적 계발은 배척되고, 교육은 전적으로 도덕적 성격을 띠고 내세에 대한 준비를 최우선적인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또한 교육내용은 각급 학교의 수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대부분 기독교 교리와 성경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그리이스의 철학과 사상 등을 가미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육방법에 있어서도 자유로운 토론보다는 암기와 필사(고전을 베끼는 일), 훈련, 체벌 등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이스의 자유주의적ㆍ개인적 교육과 로마의 실제적ㆍ사회적 교육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엄격한 도덕적 훈련에 의한 교육이 지배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서양 중세의 비종교적 교육기관과 그 특징

셋째로 “서양 중세사회에서 비종교적인 학교교육기관은 어떠한 것들이 있었으며, 각각의 기관은 어떠한 특징이 있는가”라는 점을 검토해 봅시다. 중세 봉건사회의 교육이 아무리 기독교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비기독교적 교육, 즉 세속적인 교육이 전무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대표적인 비종교적 교육 몇 가지만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그 첫째는 기사교육입니다. 중세 후반의 대표적인 비형식교육이었던 기사교육은 영주와 국왕들의 필요에 의해 생긴 교육입니다. 다시 말하면 국왕이나 영주들은 자신의 재산을 보호, 확장하기 위한 자위 수단으로 사병을 기르고 조직화하였는데, 그들은 군대를 다스리는 무사에게 작위와 토지와 권한을 부여하는 대신 무사들은 그 대가로 충성을 바침으로써 철저한 주종관계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무사들을 일반적으로 기사라 칭하며, 기사를 기르기 위한 사적 교육을 일컬어 기사교육이라 합니다. 이 기사들은 보통 방위 및 농노ㆍ노예 관리를 담당하는 중상류계급을 이루었으며, 따라서 중상류계급에 요구되는 용기와, 충성심, 관용, 예의범절, 정의, 공익 등의 덕목을 주로 수학하였습니다. 12세기경에 절정에 달한 이 기사교육의 단계는 대략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1단계는 주로 가정에서 이루어진 교육으로서, 순종과 덕, 쾌활한 성격, 바른 자세, 경건한 신앙심 등을 모친으로부터 배웠습니다. 2단계에서는 궁전이나 영주의 저택에 들어가 귀족사회의 생활을 직접 배웠으며, 3단계에서는 영주나 선배 기사들을 보필하며 실전기능을 습득하는 등 본격적인 기사수련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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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중세시대에 나타난 특징 중의 하나는 일반 서민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서 역할을 했던 기독교교육이나 기사교육이 아닌 시민교육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교육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시민교육이 발생하게 된 사회적 배경부터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2-13세기의 유럽은 물밑에서 중요한 사회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사상ㆍ문화적인 측면을 먼저 살펴보면, 그 때까지 기독교문화에만 매몰되어 있던 유럽인들은 십자군원정으로 인해 사라센문화 등과 같은 다양한 사상과 문화를 접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교황의 권위와 신에 대한 경외심이 약화됨과 아울러 이민족의 사상과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서서히 해소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가 ‘전부’라고 여기던 유럽인들에게 기독교 외에 새로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는, 다시 말하면 새로운 세계관을 갖도록 해 주는 계기로 작용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정치ㆍ경제적인 면에서는 기존의 계급질서가 와해되는 한편 새로운 계급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점은 중세 봉건사회를 뿌리로부터 흔들어 놓고 장차 새로운 근세 시민사회를 도래하게 만든 근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사회의 주인과 노예의 관계와 달리 중세의 영주와 농노의 관계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습니다. 그런데 비교적 자유로운 이들 관계 속에는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지기만 하면 일부 농민들이 농노의 신분에서 벗어나 상업이나 직인 등과 같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활발한 상업과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상업과 교역에 유리한 화폐경제의 발달을 가져왔고, 동시에 상업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 상업도시들이 발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농노신분에서 벗어난 농민들과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영주들을 비롯한 지배계급의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민세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부의 지속적인 재생산을 위하여 자녀들에게 기본적인 문자와 셈하기 등을 교육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상업도시에 비해 뒤지기는 했지만, 상업과 교역의 발달이 농촌에도 영향을 미쳐 농민의 자제들도 기본적인 교육을 받을 필요가 증가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필요를 반영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 시민교육입니다. 물론 아직은 맹아적인 형태에 불과하였지만, 서양의 역사에 있어서 서민들 더 정확하게 말하여 피지배계급의 자제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때부터 서서히 발달하기 시작한 시민교육이 19세기의 서구사회에 거의 일반화되었고, 현대에 우리가 받고 있는 초ㆍ중등교육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법적인 차원에서 제반 귀속적(선천적) 차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보장하려는 대중교육을 현대 교육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라고 본다면, 중세 말엽에 나타난 이러한 교육적 변화는 ‘현대적’ 교육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중세 말엽에 나타난 시민교육을 형식적인 교육, 즉 학교교육과 비형식적 교육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학교교육은 중등교육과 초등교육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자의 대표적인 예로는 영국의 문법학교와 공립학교(Public School), 독일의 라틴어학교 등이 있습니다. 이들 중등교육기관은 당시에 상업을 통하여 부를 축적함으로써 상류계층을 형성하고 도시의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 신흥시민들이 만든 학교입니다. 즉 신흥계급은 자유도시에서 그들이 점하고 있는 위치를 계속 유지할 목적으로 자녀에게 지도자적 자질을 길러 주기 위해 세운 학교가 바로 이들 중등학교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중등학교는 궁극적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이러한 중등학교의 성격이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명문이라고 하는 Winchester, Eton, Westminster 등은 중세 말엽 또는 근세 초기에 세워진 가장 대표적인 중등학교들입니다. 다음으로 하층의 시민계급이 주로 받았던 초등학교로는 영국의 조합학교와 독일의 교구학교, 그리고 조합학교와 교구학교가 결합한 형태의 시민학교 등이 대표적인 예인데, 이들 학교는 서민들이 생활에 필수적으로 요청되었던 기본적인 직업기술이나 문자를 습득하는 것을 그 주요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육과정의 구성이 조잡하고 교육방법 또한 단순히 체벌이나 암송에 의존하는 등 그 수준이 낮은 매우 편이었습니다.

다음으로 가장 대표적인 비형식적 교육은 전문적인 직업교육제도였던 도제교육입니다. 비록 비형식적인 교육이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위에서 설명한 초등학교들과는 달리 매우 체계적이고 조직적이었습니다. 도제교육은 도제단계, 직공단계, 장인단계 등 주로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어떤 하나의 기술이나 기능을 완전히 습득하여 조합으로부터 장인으로 인정받게 되면 비로소 자신의 자유로운 직업생활에 종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도제교육은 19세기 근대학교의 출현과 더불어 그 기능을 학교에 이양하면서 쇠퇴하였으나, 유럽에는 오늘날까지도 그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비종교적인 교육기관의 종류와 성격에 대해서는 이 정도에서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학생은 강의계획서에 소개한 도서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우메네 사토루의 [세계교육사](풀빛, 110-195쪽)에는 시민교육과 관련된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쉽고도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4. 대학의 출현 배경, 대학의 특권 및 사회적 영향

네 번째로 “중세의 대학은 어떠한 사회적 배경에 의해 발생하였으며, 대학에 부여된 특권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그리고 대학은 또한 사회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대학의 성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사회적 배경을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중세 대학의 성립 배경은 크게 네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여 대학의 성립은 이 요인들이 각각 단일하게 영향을 미쳤다기보다는 서로 복잡하게 뒤엉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하며, 나아가 이 네 가지 외에 다른 요인들도 충분히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대표적인 요인들만을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 첫째는 학문적 측면입니다. 사실 이 ‘학문적’이라는 말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달리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해 사용하는 것이므로 이 표현에 크게 구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수도원과 본산학교에서 비교적 수준이 높은 학문적 연구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었다는 점과, 12세기경에 십자군원정 및 상업과 교역의 발달로 타문화와 활발하게 접촉하는 과정에서 이미 대학이 존재하고 있던 동방의 이슬람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 두 가지입니다. 전자가 대학의 출현에 필요한 학문적 기초 요인으로서 작용했다면 후자는 대학의 발생에 외적 자극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의학적 측면입니다. 당시 사회가 페스트와 같은 유행병에 시달리고 있었고 더욱이 십자군전쟁으로 부상자들이 속출했기 때문에 의술과 의학적 지식이 절실하게 요구되었습니다. 특히 살레르노대학이 이러한 사회적 필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남부에 위치한 살레르노는 기후가 매우 온화한 곳이었기 때문에 병약한 사람들의 휴양지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많은 병자들이 살레르노로 몰려들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의학 연구의 필요성이 일찍부터 대두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전통적인 그리이스의 의학과 새로운 사라센 의학(이미 이슬람의 대학들은 의학을 주요 과목으로 다루어 왔었다)을 보다 심도 있게 연구하게 됨으로써 대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셋째로는 경제적 측면입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12세기 당시는 상업과 무역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그로 인하여 시민사회가 성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업과 무역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사회는 단순한 전통적 규율과 관습에 의해 통제되던 중세사회에 비하여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만큼 복잡한 이해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잡한 이해관계는 결국 빈번한 분쟁을 낳게 되었고, 경제적 이해를 둘러싼 이러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보다 전문적인 법률적 지식이 요구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생긴 볼로니아대학이 법학과로 출발하여 명성을 떨치게 된 것도, 볼로니아가 다른 도시들에 앞서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넷째로 정치적인 측면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대학은 황제나 국왕 또는 교황의 인가를 받아 설립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물론 대학의 입장에서 볼 때 대학으로서의 특권을 얻기 위해 그들의 공식적인 인가를 보다 적극적으로 받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황제, 국왕 그리고 교황의 입장에서도 전문적인 지식으로 사회적 명성과 권위를 인정받는 단체(대학의 초기 형태는 구체적인 학교라기보다는 일종의 연구단체나 연구소 또는 조합과 같았다)들을 자신의 세력권에 두기 위하여 각종 특권을 부여하면서 공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즉 연구단체와 국왕 등의 지배세력의 이해가 서로 결합되어 16세기 경 유럽에 80여 개의 대학이 설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다른 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학문적 성격이 강한 대학의 출현과 발전 역시 사회적 조건과 요구가 강력하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대학의 성립 배경을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대학의 주요 교육내용과 방법, 특권 그리고 대학이 사회에 미친 영향 등을 요약하여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당시에 가장 체계적으로 조직된 대학에서는 신학, 법학, 의학, 문학 등을 주요 교육내용으로 삼았는데, 이러한 교육내용에 따라 분과 역시 신학과, 법학과, 의학과, 문과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신학이 대학의 주요 과목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 수도원, 본산학교, 스콜라철학 등 기독교 세력의 영향이라면, 7자유과ㆍ아리스토텔레스ㆍ심리학ㆍ자연철학ㆍ윤리학 등을 주로 수학한 문과의 경우 그들이 기독교의 이론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오랫동안 연구해 온 학문적 결과가 구체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법학과 의학은 당시 사회의 현실적 필요를 반영한 것입니다. 현대의 대학에서 이들 분과가 가장 핵심적인 분야로 자리잡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전통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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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교육방법은 아직 인쇄술이 폭넓게 발달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주로 강의와 청강 및 필기 그리고 토론 등에 의존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대학이 소유하고 있던 특권에는 병역면제권, 면세권, 대학 내에서의 재판 및 처벌권(치외법권), 학위수여권 등이 있는데, 이러한 특권은 사실 오늘날에도 부분적으로나마 계속 유지되어 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학이 사회에 미친 영향을 세 가지만 지적해 보면, 첫째로 자유로운 학문 탐구를 통해 훗날 종교개혁과 문예부흥운동을 촉발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입니다. 둘째로는 서양의 고전문화를 계승함과 아울러 동방의 문화를 서양에 소개해 주는 가교적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는 점이며, 마지막으로 정치ㆍ사회ㆍ종교적 문제에 대한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태동시키는 데 큰 몫을 차지했다는 점입니다. 대학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대부분의 교육사 문헌들이 대학의 성립 배경과 특징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더 상세한 부분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5. 중세사회의 몰락 원인과 교육의 영향

이제 마지막으로 “중세사회가 쇠퇴한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으며, 교육은 중세의 쇠퇴와 근대사회의 성립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중세 사회의 쇠퇴 요인과 관련하여 앞에서 이미 부분적으로 또는 간헐적으로 언급했으므로, 여기에서는 간단하게 종합하여 말씀드립니다. 중세 사회가 쇠퇴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보다도 경제 및 계급구조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상업과 무역의 발달이 기존의 계급질서와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면서 새로운 시민계급을 출현하게 만들었고, 이 시민계급은 중세적 지배계급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14세기경에 이르러서는 중세의 분권적 봉건제도가 붕괴되는 구체적인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세속적 시민교육의 확산, 대학의 성립으로 인한 활발한 학문연구, 그리고 외래 문화의 영향 등으로 중세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싹트게 되는데, 이러한 시각의 변화가 중세적 봉건제도를 무너뜨리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육은 중세의 붕괴와 새로운 근대 사회의 성립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사실 이 질문은 비단 중세 사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교육적 성격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어쩌면 교육사를 연구하는 근본적인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다시 말하면 한 시대 또는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그리고 새로운 사회의 도래에 교육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밝히는 것이 교육사의 연구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교육은 본질적으로 보수적 성격과 개혁적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즉 교육은 기존 사회 질서의 유지에 능동적으로 작용하는가 하면 부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사회 질서에 순응하여 그것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기존의 구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창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지금까지 살펴 본 중세 말기의 상황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기독교교육이나 기사교육이 기존의 봉건적 사회구조를 유지ㆍ보존하려는 반동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면, 시민교육은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여 근세라는 전혀 새로운 사회의 형성을 가속화시키는 변혁적 또는 진보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이중적 성격으로 인해 교육을 둘러싸고 보수적 세력과 진보적 세력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을 일으켰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2-13세기경에 상업의 발달, 자유도시의 성립, 시민계급의 형성, 대학의 설립과 시민교육의 발달 등과 같은 중세사회의 붕괴 현상이 나타나자 이노센트 3세가 본산학교 또는 사원학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강력한 교육정책을 추진했던 역사적 사실에 교육을 둘러 싼 신구세력의 이러한 갈등과 대립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당시의 교육이 중세를 붕괴시키고 근세라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교육이 어떠한 역학관계 속에서 그러한 역할을 수행했는가, 정치ㆍ경제ㆍ문화 등과 같은 교육 외적인 부문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면서 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는가 등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육을 교육 자체로만 다루거나 사회의 변화를 교육이라는 단일한 요인으로만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교육을 ‘순수한’ 교육 자체로만 이해하고자 하는 어떤 시도도 과학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실을 왜곡시키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중세 봉건사회에서의 교육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이, 교육은 결코 탈사회적이거나 탈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다시 말하면 사회와 정치와 경제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행위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이 우리가 중세의 교육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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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듄 소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소개 차원에서 대략적으로만 언급했던 듄 세계관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세계관과 스토리의 핵심테마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내용입니다.
👓 확장 세계관 참고도서는 듄 백과사전을 이용했습니다. 듄 백과사전은 1984년 프랭크 허버트의 절친이자 SF소설을 문학적 위상을 높이는데 많은 공헌을 한 영문학 교수 윌리엄 E 맥닐리가 여러 작가와 아티스트들의 듄에 대한 상상을 모아 편저한 책입니다. 프랭크 허버트가 직접 추천의 말을 담은 머릿말을 쓰기도 했죠.
듄 백과사전은 오리지널의 4권 \”듄의 신황제 1981\” 이후 나온 책입니다. 하지만, 프랭크 허버트는 자신이 앞으로 쓸 책이 이 듄 백과사전에 구애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고 이후 나온 5권 6권에서는 차이가 있는 내용이 있기는 합니다. 주로 미래 사건에 관한 얘기기는 하지만 어쨌든 공식적인 정전, 캐논은 아닌 셈이죠.
📽공식적인 캐논 소설은 프랭크 허버트의 사후 아들인 브라이언 허버트와 SF작가 케빈 앤더슨이 내놓는 확장 소설들인데요. 이게 팬들에게 엄청나게 욕을 먹고 있습니다. 수준낮은 SF모험소설을 듄 이름을 달고 팔아먹는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요. 브라이언 허버트는 아버지의 미완성 노트를 바탕으로 스토리를 썼다고 이야기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죠.
🎩어쨌든 원작 이름에 값하는 방대함과 품격을 갖춘 듄 백과사전에 비하면 아들의 공식 캐논 소설들은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듄 백과사전을 캐논 이상으로 대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들에 의해 출간이 금지된 듄 백과사전을 종이책 구입하는 것이 팬들 사이에서 자랑이 되고 있을 정도죠. 중고책이 미국에서 한 30만원 정도하는 것 같습니다. 또 듄 백과사전은 인류 역사 연대와 세계관 설명이 체계적으로 잘 나열이 되어 있습니다. 소설마다 떡밥을 마구 뿌리며 뒤죽박죽이 된 캐논 소설보다 정리하기가 더 쉽다는 점도 있었습니다.
😊👓 이번 신장판 도서에서도 Bene Gesserit는 베네 게세리트라고 되어 있는데
저는 영어발음이 익어서인지 자꾸 베니 제서리트라고 읽게 되네요.
라틴어로 정확히 읽으면 베네 게세리트가 맞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듄 배경이 기원전 고대 지중해가 아니라 미래 인류이기 때문에
정확한 그리스식 라틴식 발음보다는 작가가 제시한 발음을
따르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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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 Zabriskie의 The Life and Death of a Certain K. Zabriskie, Patriarch에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 표시 4.0 라이선스가 적용됩니다.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4.0/
출처: http://chriszabriskie.com/vendaface/
아티스트: http://chriszabriski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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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사람들은 어떤 일상을 보냈을까?


역사 세계사 중세
이번 영상에서는 몽타이유라는 마을의 사례를 통해 중세 사람들이 어떠한 일상을 보냈는지 다뤄보았습니다.
참고자료
Davis, Natalie Zemon: Les conteurs de Montaillou, in: Annales Économies, Sociétés, Civilisations, vol. 34, n. 1,‎ 1979, p. 61–73
Le Roy Ladurie, Emmanuel: Montaillou, village occitan de 1294 à 1324, Paris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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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의 작위와 명칭 [소설에 도움되는 인문학]


중세나 판타지 장르의 소설, 웹툰, 드라마 등을 보면 항상 등장하는 것이 귀족의 명칭입니다. 공작이니 백작이니 대공이니 이러한 귀족의 명칭은 처음 접하면 생소할 수 있습니다. 이에 도움이 되셨으면 해서 만든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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