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현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의 생애 | 윌리엄 캐리 – Pickpeup

윌리엄 캐리: คุณกำลังดูกระทู้

◈현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의 생애

출처

 

윌리엄 캐리는 1761년 영국 노스햄턴 에서 태어났습니다.

윌리엄은 신앙심이 깊은 할머니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윌리엄은 자연에 대한 사랑이 많았고,

동식물을 좋아하여 자연에 대한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였습니다.

 

윌리엄이 12세가 되자 돈을 벌어야 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과 관심사가 비슷한 삼촌의 집에서 정원 일을 배우기 시작했읍니다.

 

그러나 이 일을 하며 손에 홍진이 퍼지게 되었고

2년 동안 이 질병으로 고통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과로로 인해 건강에 이상이 생겼고

휴양을 해야 하는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연에 대한 연구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분명한 목표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일은

윌리엄 캐리의 인생에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가족 회의에서 윌리엄에게 구두 제조업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윌리엄의 아버지는 니콜스 라는 구두 수선공에게 아들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친 입에다 좋지 않은 기질의 소유자였습니다.

윌리엄은 말과 실제 행동이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염증을 느끼게 되었고

많은 동료들과 세상적인 즐거움에 (구두 제조업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이 가운데 니콜스의 가게에서 일하던 사람들 가운데 존 와르 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기에 윌리엄 옆에 존 와르를 두셔서

젊은 윌리엄의 삶이 영적으로 각성 되도록 하셨습니다.

 

존 와르의 경건한 삶은 계속해서 윌리엄에게 영향을 미쳐

그에게 동료의 신실성, 순수성,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을 느끼도록 했습니다.

 

윌리엄은 마침내 한 기도 모임에서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13:13) 라는 말씀의 설교를 들으며

자신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께 헌신했습니다.

 

▲그가 20세가 되던 1781년 6월 10일 주일에 도로시 플래케트와 결혼했습니다.

20대 초반에 이른 캐리는 복음의 여정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

새로운 인생의 날개를 펼치게 되었습니다.

 

윌리엄은 그의 (구두) 작업대에 앉아 라틴어와 헬라어에 대한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온갖 집안 일로 인해 매우 분주했습니다.

또 저녁에는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마을의 조그만 모임에서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캐리가 인근 마을에서 설교를 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고향 사람들은

자기 마을의 강단에서도 말씀을 전해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캐리에게 모든 문제가 순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과 딸이 열병을 앓았고, 어린 딸 앤은 쉽게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병은 학질로 이어졌는데, 캐리는 이때부터 거의 1년 간이나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의 사업도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때때로 가족들의 식량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윌리엄은 가르칠 기회가 보다 많은 이 웃마을 물톤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물톤에 원래 선생님이 돌아와 수입이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캐리는 이와 같은 악조건에서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가르치는 일을 했으며, 신발 만드는 일을 통해서도 지속적인 수입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능한 모든 시간을 활용해 스스로를 훈련하는데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에서 적합한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단련할 뿐만 아니라, 아주 폭넓은 유용한 지식들에 통달해야 한다는 사실에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도를 붙여 놓고 멀리 떨어진 지역의 특징들을 보다 잘 파악해 두려고 노력하며

공부 목록에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네덜란드 어를 포함시키기도 했습니다.

 

▲윌리엄은 물톤의 한 침례교회에서 목사로서 새로운 훈련 과정에 돌입했습니다.

그가 부임할 즈음 이 교회는 오랜 시간 목회자가 부재했던 상태였습니다.

 

그가 부임한 이후, 교인들이 교회의 새로운 사명을 깨닫고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관심사가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었으며

캐리가 인도하는 예배에 회심 시간이 새로운 순서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얼마지 않아 회중들은 그를 초빙해 그들의 정식 목회자가 되도록 했습니다.

후에 그에게는 평신도 사역자로서 얻은 명성 이상의 공식적인 인정이 필요했습니다.

 

자신이 목회를 하기에 적합한 사람인지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결국 올니 교회 목회자가 되고자 신청을 했습니다.

 

회중들은 목회자로서의 캐리의 능력을 판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많이 초조해 했으며 당황했습니다.

 

이듬해 캐리는 물톤 지역의 회중들에게 목회를 계속 하기 위해 재심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회중들은 그를 받아들였으며, 하나님이 그분의 섭리 가운데 그를 부르시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권리를 그에게 부여했습니다.

 

그가 25세가 되던 1786년 8월 1일에 물톤에서 안수를 받았습니다.

캐리는 1년에 대략 75달러를 받는 조그만 교회의 목사로 물톤에 돌아왔습니다.

 

이는 너무 적은 수입이었기에 캐리는

토마스 고취 라는 제화업자를 돕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윌리엄의 열성적인 언어학적 노력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풀러는

자기 교회의 집사였던 고취에게 캐리가 열심히 끈기있게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말해 줬습니다.

 

고취는 캐리에게 주당 10실링을 투자 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목사로서 캐리의 사역에는 커다란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엄은 연구와 사역과 목회적인 돌봄으로 분주한 목사이기는 했지만

이국 땅에서 살고 있는 이방인들에 대한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이 그를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1788년 교회 일로 버밍햄울 여행하던 캐리는 토마스 포츠를 만났습니다.

포츠는 캐리를 설득해 이 주제에 대해 해외선교에 관한 팸플릿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선교적인 사명을 다하도록 촉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선교운동을 위한 하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므로

캐리의 인생에서 놀라운 사역을 향해 떠나야 할 시간까지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캐리는 레이체스터 에 있는 하비레인 교회에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레이체스터 의 교회는 타락에 빠져있었고, 교인들 사이에 싸움이 빈번했고,

서로를 향한 비난이 무성했습니다.

 

음주문화가 만연되어 있어서 심지어 교회 중직들 가운데도 중독자들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회중들 가운데 불만을 품은 교인들은 목회자에게 비난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험을 통해 그를 선교현장으로 보내시기 전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1719년 케리는 친구들로 구성된 특별한 모임에서 자신이 만든 팜플릿을 읽었습니다.

이 책자는 지리적인 사실과 민족적인 상황에 대한 심도있는 지식을 근거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 팜플릿 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s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

은 책으로 출판되어 약 35 센트에 팔렸습니다.

이 책은 아주 걸출한 작품으로 <현대 선교의 대헌장>인 동시에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이정표 라고 불려 왔습니다.

 

팸플릿의 출판과 이 주제에 관한 캐리의 지속적인 호소로 말미암아

그는 1792년 5월 30일 노팅햄 에서 열리는 연합회의 강의 시간에

말씀을 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캐리의 호소는 강렬했으며, 그가 청중들에게 던진 인상은 심오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내뱉는 사상의 불길은 우리의 귀에 아직도 쟁쟁한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캐리의 노력 끝에 1792년 10월 2일, 최초의 현대적인 선교단체인 <침례교 선교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선교회 조직을 통해 캐리는, 젊은 의사이며 인도의 선교사역에 자신의 전적으로 헌신한

토마스를 만나게 되고, 그의 가족과 함께 인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캐리는 인도 사람들의 종교적인 진지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빛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서

맺을 열매들을 두 눈으로 보는 것처럼 보았습니다.

 

그러나 현대 선교 운동이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시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캐리는 엄청난 좌절감과 상심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따르게 돼 수많은 선교사들의 무리가 겪게 될 모든 역경을

몸소 경험해 보아야 했습니다.

 

가지고 있던 돈은 바닥나고, 토마스와 캐리의 가족들은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캐리 일가의 사정은 정말 비참할 정도였습니다.

 

사면초가에 물린 캐리에게는 오직 한 길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곳으로 눈을 돌려 구조의 손길을 간구했습니다.

캐리는 전능자의 대한 신뢰와 믿음의 목소리를 더욱 높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곳(하늘)으로 눈을 돌려 구조의 손길을 간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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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윌리엄 캐리는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인도에서의 소금 부서에서 보조 책임자로 일하고 있던 찰스 쇼트가 말을 건냈습니다.

쇼트는 윌리엄 캐리를 만나 고통을 겪고 있는 가족들의 애처로운 이야기를 듣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온 가족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갖다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오직 도움은 하나님의 하늘 보좌로 가까이 다가가야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을 캐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도인들의 손에도 성경을 들려주겠다는 캐리의 변함없는 비전은

계속해서 일어나는 당혹스러운 많은 역경 속에서도 그를 굳건이 붙들어 주었습니다.

 

캐리는 국내선교위원회 에서 돈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디고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원주민들에게 벵골어로 말씀을 전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쉬지 않고 말씀 번역하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드디어 1797년에 신약성경이 벵골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차근차근 언어 공부와 성경번역을 계속하면서 그는 말씀을 전하러 다녔습니다.

 

이즈음에는 자신이 사역하고 있던 지역의 방언을 능숙하게 살 수 있게 되었으므로

주일이나 주 중에 저녁 시간에 며칠 간 인근 마을을 방문해서

원주민들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학교를 시작했으며 12명의 젊은이들을 훈련하기 위한 대학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머지 않아 이 계획은 일장춘몽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여전히 그는 단 한사람의 회심자도 얻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카스트 제도로부터 추방되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러한 곤궁 가운데서 자주 겸손하게 기도하곤 했습니다.

‘오 하나님 저로 하여금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그는 확신을 가지고 고백했습니다.

‘내게는 하나님이 있다. 그분의 말씀은 진리이다.

하나님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서 나의 사역을 뒤흔드실지라도

내가 가는 길에 어떤 기적을 예비해 놓으셨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고 평안가운데 거할 것이다’

 

6년뒤 구약성경에서 몇 개의 장을 제외하고는

전체 성경이 벵골어로 출판될 준비가 완료 되었습니다.

 

캐리는 오랫동안 이 원고가 인쇄 되어

인도인들에게 배포될 준비가 되는 것을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1800년 1월 1일 캐리와 그 일행은

자신들의 소유물인 인쇄기와 세람포르의 식물표본을 가지고 강을 따라 여행을 떠났습니다.

 

거기(세람포르)에서 자신이 지도자이자 책임자로 세워지는

공동체 선교 정착지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캐리는 인도 사역에 대한 목표로 설정해 두었던 한 가지 과업,

곧 벵골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완수했습니다.

 

1800년 1월 10일 선교사 일행은 세람포르에 도착했습니다.

이 도시는 캘커타에서 2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 인구 밀도가 높은 중심지로

전 세계로 통하는 상거래의 관문이기도 했습니다.

 

이 곳에서는 캐리, 마쉬맨, 워드가 선교사역의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아마 세람포르의 삼총사)

훗날 캐리가 완성한 작품들이 워드에 의해 책의 형태로 인쇄되어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1800년 5월, 캐리가 오랜 기간 온갖 노력을 집중한 결과인

최초의 <캐리역 벵골어 신약성경>이

드디어 워드의 인쇄기를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도인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워드의 인쇄기를 이용해 많은 전도지를 만들었습니다.

1800년 12월 22일, 마침내 크리쉬나팔과 고쿨이라는 두 형제가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날 그들은 선교사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한 시도였습니다.

왜냐면 그로 인해 그들은 힌두교의 카스트제도를 어겼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들은 다가오는 주일에 인도에서 탄생한 최초의 그리스도인에게

침례를 거행하는 날로 결정했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힌두인들 사이에서는 일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무리들은 위협을 가고 욕설을 퍼붓고 비아냥거리면서

만약에 침례가 예정대로 거행 된다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자기 동족들을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러나 크리쉬나팔은 믿음에 굳게 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 날이 밝고 크리쉬나팔은 캐리의 아들인 펠릭스와 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리쉬나팔의 아내와 그의 누이 제이마니가

고쿨과 그의 가족 전체 와 더불어 침례를 받았습니다.

 

불행하고 가엾은 계층에 속한 벵골인들 가운데 한 과부도

그들과 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1801년 3월 5일은 선교사들에게 최고의 기쁨은 안겨준 또 다른 하루가 되었습니다.

그날 장정(출판)을 한 최초의 벵골어 신약성경이 성만찬 탁자 위에 헌납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곳 주민들을 위해 뱅골의 고유 언어로 인쇄된 최초의 책이었으며

캐리가 인도에서 보낸 7년 반 동안의 삶을 대변하는 작품이었습니다.

 

▲1801년 4월 8일 흥분할 만한 소식이 도착했는데 그것은

인도총독이 설립한 포트윌리엄 대학에 (세람포르 지역)

윌리엄 캐리를 뱅골어 교수로 임명해도 좋겠느냐는 요청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은 한 선교사, 그것도 비국교도 출신의 선교사를

(영국 또는 식민정부가) 실제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캐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동의를 했습니다.

캐리는 교수 사역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하며 아주 결단력 있게

자기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이 사역에 자신을 헌신했습니다.

 

캐리는 학식이 높은 힌두인들을 조력자로 선발했습니다.

1806년 캐리는 정식 교수가 되었으며, 30년 동안 교수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캐리의 노력을 통해 뱅골어, 마라티어, 펀잡어, 텔루구어, 및 카나레제어 문법책이 탄생했습니다.

힌두인들의 역사, 문화, 종교의 관점을 담은 그의 저술들은

오랜기간 이 분야에서 상당한 권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가르치는 일로 인해 아주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캐리는 자기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선교사역을 게을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집 근처에 조그만 오두막집을 지어놓고 여기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점차로 이 곳은 인도인 크리스천들이 모이는 집합소가 되었습니다.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 계층에 속한 사람들도 찾아와 침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회심한 사람들은 인도인들에게 버림 받은 사람으로 취급 되었습니다.

회심자들 가운데 여기저기에서 변절자 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읍니다.

 

또한 선교 활동에 대한 정부 당국의 제재가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새로운 총독인 민토 경이 도착한 뒤, 선교본부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민토 경에게 전도지가 유포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문제를 키우는 것일 뿐 이라고 말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심사숙고한 끝에 선교사들은

자기들의 사역을 설명하는 문서를 준비해서

민토 경을 직접 면담하고자 대표단을 보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난 후에 민토 경은

자기에게 그릇된 정보가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캐리는 더 커다란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1807년 12월 7일에 아내가 죽은 것입니다.

 

캐리는 외로움에 시달리는 가운데 몇 달을 보냈습니다.

세람포르에 선교본부가 시작되던 해에

덴마크 귀족 출신인 샬롯 루모르 부인이 이 정착지로 왔습니다.

 

그녀는 그 때부터 선교에 있어서 열성적인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아내의 죽음 이후로 외로움에 시달리던 캐리는

선교 본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 조력자에게

그의 마음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1808년 5월, 그와 샬롯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새로 맞이한 아내는 캐리에게 커다란 도움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캐리의 사역에 재정적으로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번역 작업에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탁월한 언어 능력으로 덴마크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에 능통했습니다.

성경 원전을 공부하는 캐리에게 있어서 샬롯은 많은 짐을 덜어준 귀중한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 이제 성인이 된 캐리의 자녀들은 그에게 커다란 만족의 원천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펠릭스는 버마에서 선교사로 촉망을 받고 있었습니다.

 

젊은 윌리엄도 안수를 받았으며, 캐리가 초기에 인디고(식물) 재배 업자로 사역을 하면서

최초의 회심자를 얻기도 했던 지역으로 파송되어

선교사 겸 선교사업가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캐리는 이 시기에 브라운 대학에서 수여하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는 영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캐리의 요동치던 인생의 강물도 1809년 6월 26일 잠시 멈추게 되었습니다.

 

열병에 걸려 2주 동안 너무도 심하게 앓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회복되지 못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번역작업에 지속적으로 매달린 결과

벵골어 성경 두 번째 판을 막 끝마친 직후였습니다.

 

사실 캐리의 중심 사역은 성경번역 이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가장 우선시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에 가장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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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는 명석한 두뇌를 바탕으로 동양 언어학의 대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1825 년도 영국 침례교 선교회 연례 보고서에는 캐리의 편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머지않아 신약성경은 34개 언어로 출판 될 것이며

구약성경은 8개의 언어로

그와 더불어 3가지 종류의 힌두어 신약성경의 번역본이 출판될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커다란 시험이 1812년 3월 10일에 닥쳐 왔습니다.

어느 날 발행한 화재는 삽시간에 인쇄소를 덮쳤으며, 사흘 동안이나 불타 올랐습니다.

 

그 결과 새까맣게 탄 사무실 껍데기와 몇 가지 문서만이 남았습니다.

영국으로부터 건네받아 상당량 비축되어 있던 종이도 불길에 모두 날려버렸고

타밀어와 중국어 출판을 위한 새로운 활자들도 모드 날아갔습니다.

 

선교 본부에 원조 요청에, 도처에 있는 친구들이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편지, 돈, 인쇄장비, 가구 및 다른 모든 필수품들이 쇄도 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 않아 그들은 그 곳의 토착어로 된 문서들을 다시 인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재번역에 임하는 캐리의 인도인 동료들의 능력이 첫 번째 보다 훨씬 많이 향상되어

캐리 박사가 교정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수고를 덜어주었습니다.

 

가장 은혜로운 선물은 교단적인 배경이나 신앙에 관계없이

많은 교회들이 캐리의 선교본부를 원조하는 일에 나서서

두 달 만에 5만 달러라는 헌금 목표가 거뜬이 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쇄 시설을 재건하기 위해 받은 즉각적인 재정적인 도움보다도

더 놀라운 은혜가 다른 경로를 통해 임했습니다.

 

캐리의 인도 선교본부에서 달성한 커다란 성과들이 영국교계에 극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 즉시로 그들도 여기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수많은 과제들이 당면해 있었고

아직도 시도하지 않은 영역들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도움과 후원의 손길을 베풀고 계셨고

확고한 반석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캐리 박사와 동료들은, 복음 전도 및 목회사역에

자신을 헌신하기 위하는 원주민 그리스도인을 훈련시킬 수 있는 기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세람포르에 대학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할 교리와

그들이 가르쳐야 할 교리를 교육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산스크립트어를 습득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엄청나게 강조되었습니다.

이 기관은 순수하게 초교파적인 기반 위에 세워졌으며

아주 높이 존경을 받는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캐리는 이 기관의 운영비를 충당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후원을 호소하며

정부에도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덴마크 총독인 크레스팅 대령은 이 대학에 초대학장으로 취임 하는데 동의했으며

온 마음을 다해 정성껏 도와주었습니다.

 

1821년에 덴마크 국왕은 이 대학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선교사들에게

세람포르 정착지에 있는 커다란 저택을 하사했습니다.

 

5년 후에 그(덴마크 국왕)는 학교의 안전을 영구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이 기간에 설립인가를 내려 주었습니다.

캐리는 이 학교의 대표로 일했을 뿐만 아니라 신학교수 및 식물학, 동물학

그리고 다른 과학을 가르치는 강사로 활동했습니다.

 

또 다시 이 기간에 난처한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선교사들의 사역에 제한을 가하는 결과를 초래한 동인도회사에 현장이 개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마음을 아프게 하는 문제들이 일어났습니다.

영국에서는 선교사들이 개인적으로 재산을 착복했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퍼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소문과는 정반대로 간단한 생활필수품을 제공하는 것 이외에는

선교사들의 모든 수입은 전액 선교본부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캐리는 선의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예의를 끝까지 지켰고

이것은 모든 어려움을 넘어 서로 화해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 무렵 선교 본부에는 불행한 일들이 연달아 터졌습니다.

1820년 캐리의 두 번째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 후 1822년 8월에 그들에게 찾아온 힌두인 최초의 그리스도인 회심자였던

크리슈나팔이 콜레라로 인해 그들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1822년에 장남 펠릭스의 죽음이 캐리에게 엄습해 왔습니다.

그는 언어 학자로서 자기 아버지의 둘도 없는 조력자로 일해 왔었습니다.

 

그는 인도의 유럽 사람들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벵골어를 터득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충격적인 사건 가운데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1823년 3월 7일에 콜레라로 인한 워드의 사망하였습니다. (세람포르 삼총사 중의 한 명)

 

워드는 인쇄소를 운영하는 일과 다양한 번역본들을 인쇄하고

성경의 개정판을 내는 것을 감독했습니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윌리엄 캐리의 사역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1823년 10월 8일, 늦은 밤에 캘커타에서 돌아 오는 도중에 캐리는

항구의 부두에서 미끄러져 심하게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염증, 열병, 종기 등이 너무나 심해 전혀 회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캘커타에서 강의를 지속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세람포르에서 설교 사역을 감당하는 일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1830년에서 캐리가 세상을 떠난 해인 1833년 사이에 선교사들에게 재정적인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캘커다에서 벌여놓은 대규모 사업들이 하나씩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또한 무서운 강풍이 뱅골 지역을 휩쓸고 지나가 강변의 거의 모든 마을을 파괴시켰습니다.

이러한 재앙을 당하면서 선교 본부의 기금은 급감하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캐리는 캘커타에서 수많은 역경과 거의 굶주림에 가까운 삶을 헤쳐 나가야 했습니다.

그는 사역 초기에 사역했던 늪지대에서 심각한 열병의 공격을 당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수도 없는 정부의 완고한 처사를 경험하였으며

영국의 형제들에게 16년 동안이나 박해를 당하며 엄청나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여기에다 풀러(영국의 오랜 지인 목사)와 자기 아버지의 죽음까지 겹쳐

그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선교의 아버지인 캐리가 견뎌내야 했던 가장 혹독한 시련은

1830년 에서 1833년에 이르는 3년 동안 이었습니다. (*1934년 소천)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리는 자기 아들 야베스 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의 공급 하심을 바라볼 때

두려움과 불신으로 가득한 소리를 듣게 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내가 기대하는 최고치 이상으로 채워 주셨다.”

 

나이가 들면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자

캐리는 다른 어떤 사역보다 대학에서 아주 큰 만족을 찾았습니다.

 

인도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 외국에서 선교사를 데려오는 것보다

훈련된 인도 국민들을 통해 성취되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학이 세워지는 일이 마무리 되었을 때 그는 60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성공적인 대학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인종들에게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학생들이 모집하는 데 있어서 어떤 구분도, 차별도, 특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캐리가 선교사가 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원예 분야에서 놀라운 명성을 얻었을 것입니다.

 

어느 때인가 캐리는 아시아 학회에 참석하기 전에 농업과 관련한 여러 논문을 읽었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조림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초의 인물들 중에 한 명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캐리 박사는 전세계로부터 방문한 친구들과

저명한 사람들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정원이나 방을 찾았던 사람들은

인도의 총통, 캘커타의 (성공회) 대주교, 교사들, 사업가들, 교수들,

겸손한 그리스도인 원주민들과 같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선교사 두프가 마지막으로 캐리를 방문했을 때

두 사람은 오랫동안 명성 높은 선교사의 삶을 살았던 캐리의 생애에 회고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두프는 기도를 하고 일어나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그 방을 나와 한참 걸어가고 있는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희미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두프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자, 캐리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두프 씨, 그대는 계속해서 나를 ‘캐리 박사님, 캐리 박사님’ 이라고 불렀소.

내가 세상을 떠나거든 절대로 ‘캐리 박사’를 입에 담지 마시오.

그때는 ‘캐리 박사의 주님’을 찾으시오!”

 

이런 훈계와 책망을 듣고서 돌아간 두프는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캐리의 복음전도와 겸손으로부터

결코 잊을 수 없는 엄숙한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캐리와 동갑내기인 조지 고걸리가 방문했을 때

캐리의 책상위에는 며칠 전에 교정 작업을 마친 벵골어 신약성경 마지막 장의

교정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캐리의 모습은 주님의 출두 명령을 듣고 있는 사람처럼

이제 떠날 준비를 다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고걸리가 지금의 느낌을 물어보자 캐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내가 믿어 왔던 그 분을 알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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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을 맞이하기 위해 내가 일평생 헌신을 아끼지 않은 그분의 신실하심을 확신한다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 선다고 생각하니

나의 모든 죄가 기억나 두렵고 떨릴 뿐이라네!”

 

1834년 6월 9일 72세의 나이로 인도의 유명한 선교사요,

수많은 나라들을 겸손하게 섬긴 종이자 하나님의 아들인 윌리엄 캐리는

평온한 모습으로 이 세상을 떠나 주님곁으로 같습니다.

 

윌리엄 캐리의 대한 평가는 인도에서의 영적 전투가 한창 치열할 때

그 자신이 한 말로 대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불가사의한 부유함을 이방인들 가운데 전파하도록

이처럼 커다란 은혜를 내게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해 너무나 기쁘게 생각합니다.

비록 내가 영국의 모임들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있기는 하지만

영국에 있는 모든 모임과 지금의 내 (인도 선교사) 자리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나로 하여금 인도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기반을 마련하도록 하는 일에

귀한 일꾼으로 사용 되게 하소서!

나는 이보다 더 큰 상급이나, 이보다 더 높은 명예를 바라지 않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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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발자취를 따라서 36편 \”윌리엄 캐리\” 박한희 목사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서 36편
\”윌리엄 캐리\”
박한희 목사
0:00 인트로
0:22 서른 여섯 번째 인물소개
1:12 첫 번째 이야기 : 출생과 성장
2:49 두 번째 이야기 : 부르심
7:13 세 번째 이야기 : 사역과 업적
11:53 네 번째 이야기 : 교훈
12:43 서른 여섯 번째 시간 : 윌리엄 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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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발자취를 따라서 36편 \

Rossini/Liszt – William Tell Overture Final


Rossini/Liszt William Tell Overture Fi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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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이 돌아왔다 208회 티저 – 윌리엄네 20180104 ㅣ KBS방송


슈퍼맨이 돌아왔다 208회 티저 윌리엄네 2018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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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의 애정을 독차지한 성덕 나하은, 무대뒤에서 멤버들을 만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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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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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엄캐리가 늘 선포했던 문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1761년, 노샘프턴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윌리엄 캐리는 어릴 적부터 공부에 대한 욕구가 강해 라틴어와 히브리어, 프랑스어 등을 배웠습니다. 두 발이 유일한 교통수단이던 당시, 유망직종으로 불리던 구두 수선공이 되어 일하던 중 운명을 바꾼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19살이 되던 1779년, 국가기도일에 열린 기도회에서 히브리서 13장 13절 말씀을 심령으로 깊이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캐리는 말씀을 통해 세상과 타협하며 살던 미지근한 신앙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자 결단을 합니다. 이어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라는 책을 읽으며 옷도 입지 않고 식인 풍습을 이어나가는 부족 등 태평양의 알려지지 않은 섬들과 원주민들의 원시적인 삶을 만나게 됩니다. ‘명예도, 유익도 뒤따르지 않기에 아무도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하지 않는 현실의 기록을 발견하며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냐인의 끈질긴 외침을 듣게 됩니다. 그때부터 캐리는 세계지도 위에 인구, 종교 등을 표시하며 선교지도를 만들기 시작했고, 지도를 꼭 껴안고 기도하는 종이 됐습니다.
18세기 영국교회는 칼빈주의의 영향으로 선교를 예수님이 사도들에게만 주신 특별한 사명으로 국한시켰고 무관심했기에 캐리는 먼저 그리스도인들을 깨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유언적 명령이 곧 우리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이라 믿었고 1792년 ‘이교도 개종에 대한 크리스천의 의무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루터의 95조 항과 함께 베스트셀러가 돼 세계선교 열풍을 전 유럽으로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침례교회연합회 모임에서 이사야서 54장 말씀을 전하며, 간절한 기도 가운데 여러 목회자에게 비전을 심었습니다.
‘네 장막터를 넓히라.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그는 하나님께서 지금이야말로 나와 당신을 통해 위대한 세계선교의 역사를 이루실 때라고 역설했습니다. 기대하고 시도하라고 말했습니다. 메시지에 감동을 받은 목회자들이 곧바로 만든 것이 유명한 ‘침례교 선교회’입니다. 7년 동안 배척당했지만, 절망치 않고 믿음을 잃지 않았던 끈질긴 도전은 18세기 타락한 영국을 구원하였을 뿐 아니라 세계 각지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였습니다.
캐리는 가족, 동역자들과 함께 인도로 가 사명을 실행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인도 땅에 도착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어마어마한 장애물들이었습니다.
인도에서는 사티(Sati)라는 제도에 따라 남편이 죽으면 아내들을 함께 불에 태워 죽였고, 갠지스 강가에서는 주문을 외치며 어린아이들을 악어밥으로 던지던 풍습이 성행했습니다. 동인도회사의 점령 아래 선교 역시 금해지고 있었습니다. 캐리 가족들은 이질에 걸렸으며 결국 아들을 잃게 됐고, 아내는 정신병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캐리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하나님은 부요하시고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을 뵈올 때, 모든 근심을 내맡길 수 있었습니다. 설사 이곳에서 생명을 잃어도 고귀한 사명이 제게 맡겨진 것만으로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습니다.’
캐리는 공장 감독으로 일하며 선교비를 벌면서 인도어를 공부해, 성경 번역과 더불어 말씀을 전파하고 여러 학교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벵갈에서 7년간 땀 흘렸음에도 단 한 명의 인도인 개종자가 없었습니다. 1800년, 19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눈물과 땀의 결실로, 크리쉬나 팔이라는 첫 번째 개종자가 탄생했습니다. 카스트제도와 우상숭배를 거부하자 2천 명의 군중이 그를 재판장으로 끌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역사를 막을 수는 없었고, 그 후 18년간 600명이 세례를 받고 수천 명이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던 중 대형화재로 수년간 작업한 성경 원고와 문법책, 사전들이 불에 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던 캐리였지만 그는 다시 겸손함으로 무릎 꿇습니다.
‘잃어버린 것들이 굉장히 많고 같은 길을 두 번 가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처음보다 더 충실한 결과를 낳아 더 유익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낙망치 않고 다시 도전한 캐리는 결국 수많은 인도 방언과 중국어 버마어 말레이어 등 44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 출판했습니다.
캐리는 1834년 73세의 일기로 그토록 사랑했던 인도 세람포에 묻혔습니다. 그가 인도에 끼친 영향은 언어와 교육, 목양 분야 뿐 아니라 과부의 화형이나 유아 살해 같은 나쁜 관습을 폐지하는 데까지 미쳤습니다. 또 런던선교회와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우 선교회, 네덜란드 선교회, 교회 선교회, 영국 해외 성서공회, 미국 해외 선교위원회, 미국 침례교 선교협회, 미국 성서 공회가 창설돼 오늘날 선교의 기틀을 세운 반석이 됐습니다.
윌리엄캐리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세계선교의 불을 당긴 위대한 믿음의 용사였습니다. 그의 믿음으로 근대 선교역사가 시작되었고 19세기 선교 황금시대가 열렸습니다. 스스로 인도 땅에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돼 수많은 열매를 맺히게 한 윌리엄 캐리, 그는 진정 근대 선교의 아버지로 지금도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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ขอบคุณที่รับชมกระทู้ครับ 윌리엄 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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